▣부림면 경산리(景山里) 경산(景山)마을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는 허백영 문화원장님이 쓴 ≪우리고장 땅 이름≫과 박용식 교수가 쓴 ≪宜寧의 地名≫, 1930년대 발간된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 경산 안골(內谷, 內洞)마을
경산 마을에서 박진나루 가는 길 오른편 골짜기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곳이 안골이다. 안골은 탐진 안씨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그러나 안씨들이 강 건너 입산마을로 이사 갔다. 안골은 일제 강점기에 마을 이름을 한자로 고칠 때 ‘들어앉은 안쪽동네’라 하여 내곡(內谷)으로 바꿨다.
○ 이충각(移忠閣)
경산 마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함께 의병장으로 활동한 18의병장 중의 한 분이신 지헌(止軒) 안기종(安起宗) 장군의 이충비가 있었다. 그러나 이 비석은 건너편 입산마을 효충원으로 이전하였다. 이충각은 이 비석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이다. 안기종 장군의 고택은 입산마을에 있고 장군의 집안은 유명한 효자의 집안이었다. 그래서 탐진 안씨 8효자를 기념하기 위한 7효각이 입산마을 앞에 있다. 이충각은 ‘부모에 효도하는 정신을 옮겨 나라와 임금에 충성한다(移孝爲忠)’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낙산서원(洛山書院)
1802년(순조 2)에 송암 이노(松巖 李魯)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경덕사(景德祠)를 창건하였다. 그 후
낙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하지만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후에 후손들에 의해 낙산서당으로 복원하였다. 공은 임진왜란 중 초유사 김성일 공의 참모로 경상 우도의 의병들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 일을 하였다. 그 때 상황을 선생이 《용사일기》에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이 책은 임진왜란 의병활동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이며 현재 의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송암선생의 묘는 입산마을 뒤산에 있고 낙산서당은 경산마을 입구 도로변에 있다.
○송암 이노(松巖 李魯)선생
의령 출신의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자는 여유(汝唯) 호는 송암(松巖)이다.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4년(명종 19) 진사시에 합격하고, 을사사화 때 화를 입은(被禍) 관원들을 신원하여줄 것과 간신들을 토죄할 것을 소청하였다. 봉선전 참봉(奉先殿參奉)을 거쳐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직장이 되었다. 선생은 1590년 정여립 역옥사건(鄭汝立逆獄事件)으로 억울하게 죽은 수우당 최영경(崔永慶)의 신원을 소청여 경상우도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1591년에는 상소하여 왜의 일을 논하였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창의(倡義)할 것을 약속하고 귀향하여 삼가·단성으로 나가 동생 이지(李旨)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종사관(從事官)·소모관(召募官)·사저관(私儲官)으로도 활약하기도 했다. 1593년에는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에게 서계(書啓)를 보내어 일본과 화친하려는 잘못을 지적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사성강목 四姓綱目≫·≪용사일기 龍蛇日記≫·≪문수지 文殊志≫·≪송암문집≫ 등이 있다. 시호는 정의(貞義)이다.
○쌍명재이인로선생 추모비(雙明齋李仁老先生 追慕碑)
경산마을에서 구산마을로 가는 도로변에 비석군이 있다. 제일 큰 비석이 쌍명재 이인로선생 추모비(雙明齋 李仁老先生追慕碑)이다. 이인로 선생은 호가 여러 개 있지만 그 중 쌍명재라를 호가 널리 쓰인다. 이 호는 고려 명종 때 정월 대보름 밤에 이인로가 옥당에 입시했을 때 명종이 한림원에 명하여 등룡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이인로가 지은 시 마지막 구(欲助重瞳日月明)에 대하여 임금께서 크게 칭찬하고 상을 주셨고, 일월명(日月明) 즉 ‘해와 달이 밝게 비춘다’에서 취하여 쌍명(雙明)이라는 호를 내려 널리 쓰였다고 한다. 그 옆에는 인천 이씨 비석군이 있다. 선생을 기리는 재실인 쌍명재는 감암리 감암 마을에 있다.
○소덕산성
‘소덕산성’은 경산의 안골 뒷산에 있는 성터이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활약했던 격전지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풀이 무성하여 흔적을 찾기 어렵다.
○대성산성(大城山城)
‘대성산(大城山)’은 경산 남쪽에 있는 산이다. 이 산 상봉에 ‘대성산성(大城山城)’ 성터가 있다. 임진왜란 때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터 양쪽에 돌이 높이 쌓여 있으며 성곽의 일부가 남아 있다.
○성지골
‘성지골’은 경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성지골/성짓골, 성주골/성줏골’은 전국에 널리 퍼져있는 지명이지만 명확한 의미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읍성(邑城)이나 산성(山城)이 있던 곳을 가리킨다고 추정한다.
경산리는 초계정씨들의 은둔지역으로 정씨들이 최초 입성하였으나 인천이씨, 칠성이씨, 진양 정씨, 순흥안씨, 탐진안씨가 들어와 정착하였다. 경산리 고분은 일제 강점기에 집중적으로 도굴되었으며, 도굴된 유물이 일본으로 유출되어 일본의 각 대학에 전시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그 유물의 정확한 규모나 소재지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