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면 감암리(甘岩里) 감암(甘巖)마을
‘감암리(甘岩里)’는 부림면의 법정(法定) 동리(洞里)이며 ‘옥동(玉洞) 감암(甘巖)’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토박이들은 ‘감바우’라 부른다. 감암마을은 감암 본 동네와 대밭골 두 동네가 있다. ≪의춘지≫에는 감암리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감암리(甘巖里)는 벽진이씨의 세장(世庄)이다. 정장양공(鄭莊襄公) 유허비가 있다. 또 산천재(山泉齋)가 있다. 권용환(權鏞煥)이 놀던 곳이고 죽전(대밭골)에는 권씨가 있다.(甘巖里 李氏碧珍 世庄 有鄭莊襄公 遺墟碑 又有山泉齋 權鏞煥棲息處竹 田有 權氏).”
죽전이 바로 대밭골이다. 대밭골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곽재우 장군과 함께 싸운 권란장군이 살던 곳이다. 장군은 옥천대에 진을 치고 왜적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켰다. 옥천대는 대부정 뒤쪽 신반공원 일대를 말한다.
감암마을에서 옥동마을로 가는 도로변 산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감바우 또는 감암’이라 한다. ‘감’은 옛날 지명에서 ‘크다, 높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감암리’는 ‘큰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 감바우 높은 곳에는 벽진 이씨와 초계 정씨가 족보를 넣어두었던 장보암이 있었다. 바위벽을 파서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에 비석을 넣은 특별한 형태의 비석이 바위벽에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경지정리와 도로 확장 공사를 하며 장보암과 특이한 형태의 비석을 없앴다고 한다.
○비시골(비지껄)
마을 뒤로는 길게 뻗어 있는 ‘황조산’ 혹은 ‘뒷산’이 있고 앞에는 넓은 들이 있어 마을의 입지가 좋다. 도로를 확장하며 깍아 낸 감바위 아래에 여러 기의 비석(碑石)이 줄지어 서 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 6기를 도로공사를 하면서 이곳에 모아 놓은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비시골(비지껄)이라고 한다. ‘비시골’은 감암리에서 창골 쪽 산기슭에 있으며 옛날부터 비를 세운 산소가 많이 있었다고 전한다. 비시골에 서 있는 비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전 면장 안국제(安國濟)공 선정기념비, 비의 높이는 90cm, 폭 40cm, 두께 13cm 이다. 안국제 부림면장은 1933년에서 1939년까지 부림면장을 지내면서, 신반천 제방을 축조 하였고, 다시 1945~1948년까지 면장으로 재직하였다. 자는 태민(太民)호는 아산(峨山)으로 백산 안희제 선생의 첫째 아우이다.
2. 포유사(布諭使) 전성창(全聖暢) 차윤영(車潤英)공 송덕비, 갓 없는 비석이며, 비 높이 100cm, 폭 40cm, 두께 10cm 이다.
3.관찰사 정공만석 영세불망비 (觀察使 鄭公晩鍚 永世不忘碑) 갓 없는 비석이고, 비 높이 120cm, 폭 55cm, 두께 16cm 이다. 숭정 4년(1631), 새긴 글귀가 마모되어 판독이 어렵다.
4. 현감 홍후낙유 애민 선정비 (縣監 洪侯樂綏 愛民 善政碑) 비의 높이는 120cm, 폭 55cm, 두께 17cm이다. 현감 홍낙유는 특히 백성을 사랑하고 선정을 베풀었으니 정조 23년 기미(1799년)7월에 이 선정비를 세워 그의 공덕을 기렸다. 의령읍 무전리 88동산에도 1기가 있다 .
5.고 비서원 승 김공 종근 송덕비 (故 秘書院 丞 金公 宗根 頌德碑) 비의 높이는 136cm, 폭 42cm, 두께 13cm이다. 의령 사람으로서 1853년에 출생한 분으로 청아한 성품이다. 빈궁한 사람을 돕고 영세상인의 권익보호를 위해서도 크게 활약한 분이다. 의령 상무사가 세운 송덕비가 의령읍 무전리 88동산에 있고 신반에 상업회가 세운 송덕비가 있다.
6. 최경창 시혜 불망비 (崔慶昌 施惠 不忘碑) 비의 높이는 112cm, 폭 41cm, 두께 13cm이다. 당대 큰 부자로서 지역사회를 위하여 큰 업적을 쌓은 분이다. 불원각(不湲閣)이란 꽃집이 있었고 이 누각 안에 최경창(崔慶昌)공 시혜불망비가 있었으나 불원각은 도로공사 하면서 철거되었다.
○굴덤
비시골에서 산으로 올라가면 굴덤이라고 하는 자연 동굴이 있다. 이 동굴에는 전쟁이 나면 마을 사람들이 어르신과 아녀자들을 피란시킨 곳이다. 굴 입구는 좁아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이지만 굴 안쪽은 넓어 큰 방만 하여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공간이 된다고 한다.
○황새골/황조골
마을 사람들 설명에 따르면 동네 뒷산에 황새서식지가 있어서 ‘황새골(황조골)’이라고 불렀다. 단오에는 마을 처녀 총각이 황새골 소나무에 그네를 매고 놀기도 했다.
○갓골재
감암 마을 동쪽에 있는 고개가 바로 갓골재이다. 이 고개는 창골로 통한다.
○신계서원(新溪書院)
장양공 정준(鄭俊)공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공은 1440년 출생하여 세조 때 무과급제하였다. 그 후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두 아우와 함께 반란을 진압하여 3등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이 되었다. 공은 초계군에 봉해졌고 병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시호가 장양(莊襄)이다. 서원은 1860년 건립했고 고종 때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유림에서 서원과 신계사를 1995년에 중수 및 신축했다. 신계사는 제사지내는 사당이고 서원 뒤편에 있다. 신계사 앞쪽에는 비각이 있다. 이 비각 안에는 고적개공신(故敵愾功臣) 초계군(草溪君) 시장양공(諡莊襄公) 정선생휘준(鄭先生諱俊) 유허비(遺墟碑)가 서 있고 서원아래에 후손 도진. 응진 공의 송덕비가 있다.
○대밭골/죽전곡/죽전
‘대밭골’은 감암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 장군의 의병부대에서 활약하고 신반리 일대를 지킨 권란 장군이 살던 곳이다. 대밭골에 권씨 문중 재실인 죽림재(竹林齋)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기 어렵다.
○못꼴
‘못꼴’은 신반 현동에서 감암리 가는 도중에 있는 골짜기이다. ‘연못이 있는 골짜기’란 뜻이다. 감암리 대밭골 못 미쳐 감암저수지(甘岩貯水池)가 있었으나 그 기능을 잃고 이제는 메워 ‘부림 공설운동장’을 만들었다. 저수지 아래쪽이 바로 ‘못골’이다. 못골에는 오래된 기와집이 늘어서 있어 마을 분위기가 고풍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