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의령 만천 십완정(十翫亭)을 찾아서...
[독자기고 ]의령 만천 십완정(十翫亭)을 찾아서...
  • 의령 인터넷 뉴스
  • 승인 2022.09.23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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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신경환 경남향토사이사,의령지회장
사진=신경환 경남향토사이사,의령지회장

십완정(十翫亭)은 의령군 화정면 화양리에 유허(遺墟)만이 남아있으나 그 옛날에는 8도 명소중의 하나로서 알려진 곳으로 호음 정사룡 선생이 은거하면서 강회(講會)한 곳이다.

정사룡선생(鄭士龍)과 십완정(十翫亭)

정사룡 선생은 조선왕조 명조 때 문신이다. 명종 22년 1491년에 태어나 19세인 1509년 중종 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백부는 중종 때 영의정을 역임한 정광필이다. 내외 요직을 걷힌 다음 대제학 판중추부사를 지냈고 시문에도 뛰어났으며 음률에도 밝아 명나라의 사신을 여러 번 접대하여 명성이 높았다.

정사룡은 이량과 인연을 맺어 정일품 위계에까지 올랐다. 이량또한 명종 7년 1552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효령대군의 5대손이다.

당시 윤원량의 소윤파가 득세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함으로 이를 내심으로 두려워한 명종은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 이량을 갑자기 총애하였다. 몇 해안가서 이량은 사조 판서가 되었고,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게 되었다.

이량에게 가까이하려는 사람들도 많았고 이량 자신도 원계험, 정사룡 선생과 같은 명사들에게도 두터운 친분을 가지게 되었다. 이량은 점점 교만해져서 사림에 화를 당할 뻔하였다.

이후 이량의 생질인 심의겸이 우연히 이량 등이 흉악한 모의를 엿듣고 비밀리 왕에게 보고하여 내지(內旨)를 얻은 다음 부제학 기대환을 이용하여 상소를 올려 이량의 죄를 탄핵하게 했다.

명종 18년 1563년 이량은 강계로 귀향 가고, 정사룡도 한통속으로 몰려 의령 만천으로 귀양을 와서 십완정에서 위배생활을 보냈다.

이곳에서 함께 했던 도구 이재신 선생의 시도 남아있다.

삼진덕도선인계 절벽층암부벽심

야각동서조만수 산구남북웅군림

운횡원인증기상 안락평사송호음

승지유래무속류 강유청사호오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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