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정암 루각과 정암진, 철교를 찾아서
[독자기고] 정암 루각과 정암진, 철교를 찾아서
  • 의령 인터넷 뉴스
  • 승인 2022.08.29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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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신경환 경남향토사이사,의령지회장
사진=신경환 경남향토사이사,의령지회장

◎정암 누각

정암루는 취원루가 있었던 것으로 전하는 곳에 조선 중기 대제학을 지낸 용재 이행이 귀향살이를 하며 1935년 당시 군수 정 재상과 지역 선비들이 임진왜란 승첩지를 기리고자 군민의 뜻에 따라 정암루를 지었다. 그 후 한국전쟁으로 정암루가 소실되는 수난을 겪었으나 1963년에 군민의 성금으로 다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 지붕으로 자연 암반위에 장대석 기단을 놓아 지었다. 기둥은 모두 원기둥으로 누하주는 화강을 누상주는 목재를 사용하였다. 계단은 전면 중앙 한 곳에 두었고 기둥 상부 공포는 연화로 장식된 이익공을 결구하여 겹처마로 구성하였다. 마루는 우물 마루이며 계자 난간을 돌렸다.

정암루는 그 옛날 남강을 가로질러 나룻배가 오가던 포구였던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정자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의병장과 의병들의 중요 진지 역할을 했으며 왜란 후 근대까지도 경상도와 전라도까지 물자를 실어 나르던 교통의 요충지였다고 하였다. 곽재우 장군이 왜장 혜경이 이끈 수많은 왜적을 잠복 끝에 몰살 시킨 승전지로도 알려져 있는 곳이다.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이자 빼어난 경치로 인해 많은 선비와 가객들이 찾아 학문을 논하고 자연을 벗삼아 노래하던 이 곳은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의병장과 의병들이 전라도 진출을 노리던 안국사 혜경의 부대를 맞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역사의 산교육장인 현장이기 때문에 역사적 문화재 가치가 있는 곳이다.

사진=정암초당
사진=정암초당

「정암초당」

옛 정암누 부근에 자리잡고 있는 동심당은 이조 말엽 창건한 것으로 용재 이행선생이 휴식한 곳이며 다음과 같은 시문이 있다.

구피유명오다 정대아시람언

흔미결상뢰성명자고국경무일

부생행유애처나락삼민인사자여사

 

◎ 정암진

우리 고장 의령땅의 관문으로는 단연 정암교를 꼽는다. 이 정암교 아래 남강 물속에는 흡사 솟 모양의 바위 하나가 있으니 일러 정암이라 하고 솥바위라고도 부른다. 이 바위는 물속에 반쯤 가라 앉은 모습이 흡사 솥모양을 닮고 있으며 물속에 잠긴 부분은 솔발처럼 세발이 달려 있으니 갈데 없이 솥바위 즉 정암이다 바위 위에는 10여명의 인원이 능히 앉아서 놀만하고 더러는 낚시꾼들이 낚시도 즐기는 이 솥바위는 우리 고장 의령의 명물 가운데 하나다. 정암진은 원래 우리 고장 의령과 함안군의 경계 사이를 흐르고 있는 남강의 도선장을 이컫는 말이였다. 금은 이 곳에 철교가 놓여있어 그 옛날의 나룻터는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정암나루는 강안의 절경을 바라보면서 나룻배에 앉아 유유히 강을 건너던 우리 선인들의 운치가 한껏 되살아 나는 이름이다. 그러나 정암진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은 임진왜란 때 망우단 곽재우 장군이 이 곳에서 거둔 승첩이다. 장군은 의병들을 이끌고 이 곳에서 도강하는 왜군을 모조리 쳐 부시고 임란 전사에 길이 빛나는 전공을 세웠던 것이다. 이 곳은 주위 경관이 또한 아름답고 시원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인근의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를 않았다.

정암진 봄물은 푸른 비단을 펼친 듯

가을바람에 자굴산은 병풍이라도 친듯 산듯 하구나

春水鼎岩橫練碧 춘수정암횡련벽

秋風闍崛展屛新 추풍자굴전병신

조선초기 태종때 직제학을 지낸 어변갑은 정암진의 풍광을 이렇게 읊었으며 세종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의 시에도 푸른강 큰들에 높은 두덕 무성한 숲이라

蒼江大野 창강대야

高岡茂林 고강무림

「이행」

명신편에 취원루 시에 말하기를 주인은 정사에 서툴러도 노련한 솜씨로 새로이 높은 루를 지었네 천하의 문장을 일찍이 돌아보았는데 천년 명승은 틀림없이 길게 흐르는 강물이라네 정암의 가을 물빛 밝아 아침나절에 구경할 만 하고 자굴산 봄빛은 아득하게 떠 있는 듯 하네 다른날 오를때는 내가 이미 늙어서 은근하게 옛날 거쳐하던 곳을 떠나지 않으리라 主人政事小全牛 주인정사소전우 游刃新修百尺樓 유인신수백척루 四海文章會一顧 사해문장회일고 千年名勝定長流 천년명성정장류 鼎津秋水朝湛玩 정진추수조담완 闍崛春光遠欲浮 자굴춘광원욕부 他日登臨吾便老 타일등임오편노 慇懃好在舊林邱 은근호재구림구 라고 하였다. 어쨋건 이 정암진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길몫이니 옛날부터 부산, 김해, 창원, 마산, 함안 방면으로부터 경상도 하우도로 출입하는 길목이 되어 크고 작은 애환을 숫하게 낳았다.

「나룻배 다시 띄워지면 우리님 마중이나 갈거나」

사진=정암루
사진=정암루

정암에 사공아 뱃머리 돌려라/우리님 오시는디 마중을 갈거나 너이가 날같이 사랑을 준다면/까시밭 천리라도 맨발로 갈거나 간다 못간다 얼매나 울었던고/정거장 마당이 한강수 되노라

(후렴)아이고 되이구 뚜댕구 뚜댕구 성화가 났네 흥~

정암 뱃사공 노래는 시적 운치가 있고 가락이 살아 있다. 우리님은 솥바위의 은유로도 읽힌다. 솥바위를 지켜야 임을 볼 수있고 임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거다. 삼정승이나 큰 부자가 되지 않아도, 깜낭껏 자족하며 살면 되는 것 이게 강촌의 정서요 민초들의 사랑법이다. 이 정암 사공안 노래는 의령읍 중동리 당시 삼천리 사진관을 운영하셨던 고 오대환님이 즐겨불렀다. 그러나 이제는 나룻배가 없고보니 노래가사도 생각나지 않고 하니 부르는이도 없어졌다.

◎정암교

「1930년 하마터면 정암교 다릿발 받침 될 뻔한 솥바위」

사진=정암교
사진=정암교

정암을 다릿발로 솥바위가 하마터면 교각 받침이 될뻔했다, 1930년 초 일제는 정암교를 설계하면서 솥바위 위에 다릿발을 고정하려 했다. 수중 자연암석인 솥바위를 활용하며 다릿발을 줄일수 있고, 교량이 튼튼해질수 있다는 이유와 공사비가 절감된다는 이유였다. 이같은 설계를 바꾼 이가 일본의 토목 컨설턴트인 가바시마 마사요시 씨였다. 가바시마씨는 일본을 대표하는 경관파 교량 엔지니어였다. 1931년 정암교 건설 예정지를 찾는 그는 주변 경관을 주의 깊게 관찰한 뒤 정암교의 위치를 솥바위에서 위쪽으로 50m 가량 떨어진 현재 위치에 했다. 솥바위를 보존하고 다리에서 정암을 바라 볼수있게 또 솥바위와 다리가 경관적으로 조화되게 설계변경을 유도한 것이다. 이 비화는 도쿄대 토목과 나카이유 中井넉 교수가 쓴 근대 일본의 교량디자인 사상이란 책에 나온다 이를 소개한 당시 동아대 강영조 도시계획 조경학부 교수는 가바시마씨의 경관안목이 아니였다며 솥바위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을 것이라며 말했다 1930년 전후 경상남도의 토목과에는 일본 공옥사 공고 출신 등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정암교 설계 당시 경상남도의 토목과장은 우에다 마사요시(上田政義)씨 그는 쯔노다(角田)이야마(井山)씨 등 고교 후배들을 불러 경남의 주요 교량 공사를 맡겼다. 남지교 1932년 12월, 낙동교 33년 1월, 적포교 35년 7월, 정암교 35년 5월 등은 이들의 의해 추진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근대 교량사에는 일제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

「정암 철교 국가 등록 문화재 등록」

경남 의령군 의령읍 정암리 산 1-2 위치에서 흘러내린 남강위에 가설되어 아치의 경을 이루고 있는 정암교는 1933년 10월에 착공 35년에 준공 당시 사비는 20만원이며 교계는 근대식으로 기암채색이 아름다웠으나 6.25동난으로 정암루와 함께 파괴되었는데 2개 교각을 그대로 살려 상부는 철굴 트러스 형식으로 재건하면서 완전히 파괴된 부분을 새로운 교각으로 세워, 7개의 경관을 지닌 철근 콘크리트 T자 형태를 재건하였다. 1956년 3월 15일 총 공사비 1억 5천 5백 9십만 6천 3백 6십 7칠원의 정부 보조를 받아 3차년으로 나누어 복구공사에 착공하여 58년 10월 10일에 준공하였다. 교량 길이가 260m이고 교폭은 6m이다. 함안군을 연결하는 교량으로서 서부경남 교통 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교량으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이후에는 이 다리가 퇴락 위험하여 현재의 다리로 가설하여 왕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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