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의령의 인물 강성갑(姜成甲) 목사 편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 웅곡마을에서 출생
진주인(晉州人)으로 1912년 6월21일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 웅곡마을에서 출생, 1925년 의령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마산 창신보통학교로 진학, 1930년 3월 마산상업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81년 귀국하여 김해 읍 장유 금융조합 서기(書記)를 5년간 근무 하였으며 이때 오성은과 결혼, 1937년 4월부터 1941년 까지 서울 연희전문학교 수학하였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류되어 정학처분을 받기도 했다.
1941년 3월 일본 동지사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여 1943년 졸업하였으며 귀국 후 목사가 되었다.
1945년 11월부터 경상남도 교육양성소에서 1기부터 4기생까지 길러내고, 부산대학교(현 국립부산대학교 전신)를 설립 교수로 지내다. 1946년 8월 농촌사회 개혁으로 민족중흥을 앞당기려는 신념으로 암울한 현실의 농촌인 진영으로 왔다.
1946년 8월15일 “진영복음 중등 공민학교”의 설립인가를 받아 진영대흥 초등학교 가교사를 빌려 8월20일부터 야간학교로 설립자 겸 교장으로 문을 열었다.
10월에는 진영리 철하 마을의 일본인 소유였던 주택과 창고를 개조 하여 주야간 2부제 수업을 하였다.
이때 1947년 6월21일 자로 재단법인 3.1학원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8월 부산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였다.
1948년 1월 26일 자로 재단법인 3.1학원의 한얼초급중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9월에는 진영읍 진영리 철하 마을에 학교 부지 6,500평을 매입하여 향토의 중등교육 요람이 되었으니 오늘의 한얼 중학교가 되었다.
한국이 낳은 기독교의 참 지도자요 지정한 민족의 향토교육의 교육자이자 선각자 였다.
그러나 1950년 동족상잔의 6.25 전쟁으로 8월2일 밤 낙동강 수산교 아래애서 공산주의자란 누명을 안고 38세 젊은 나이로 그가 그렇게 사랑했단 동족의 총부리에 죽고 말았다. (진영읍 지의 진영의 역사 인물 편 중에서)
최갑시(崔甲時)
(최갑시 선생님은 강성갑 목사님과 연관이 있으므로 수록 합니다.)
생물 년대는 미상이나 당시에 진영리 부곡 부곡마을에 거주하였으며 1950년 8월2일 밤 낙동강 수산교 아래에서 고 강성갑 목사와 같이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으로 함께 처형되기 직전 강 목사가 마지막 기도를 하는 사이에 강물에 몸을 던져 평소의 수영솜씨로 구사일생 살아나 이후 강목사의 억울한 죽음을 만천하에 알리게 되어 강목사의 신원(伸寃)에 노력한 분으로 평소에 강 목사와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조선일보닷컴 김동길 인물 엣세이 중에서
나는 1970년대 (어떤 사람이기에)라는 제목으로 동서의 위인들 중에서 내가 좋아 하는 영웅호걸들의 일생을 더듬어 본적이 있다.
그 책자에는 마틴 루티, 크롬웰, 간디 같은 위인들의 삶이 짧게 묘사되어 있다.
한국 사람도 그중에 세분이 끼어 있는데 이순신과 이상재, 그리고 내가 오늘도 흠모하는 언제나 그리운 사람, 강성갑에 관한 이야기를 적은 적이 있다.
강성갑은 1912년 의령에서 태어나 마산상고를 졸업하고 한때 지방의 금융조합에서 일을 한 적이 있지만 뜻하는 바 있어 상경하여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 하여 영어를 공부 하였다고 나에게 말 한적 있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그는 곧 일본에 유학을 가서 동지사 대학 신학부에 입학했다.
아마도 그는 그리스도 복음의 전도사가 되기를 희망했던 것 갖다.
내가 대학 3학년 되었을 때 목사 강성갑은 학교 체플 시간에 강사로 모교를 찾아왔다.
그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 학생들에게 일러 주었다.
단위에 섰던 강성갑의 그 모습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자그마한 키에 단정한 생김새 였지만 그의 두 눈에서는 불이 나는 것 같은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30대 다부진 사나이였다.
그의 목소리는 약간의 비음이 섞여 있어 상냥하게 들리기는 했지만 힘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 사나이가 풍기는 강한 매력에 휩쓸려 그를 따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는 농촌에서 일을 시작해야 장차 큰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외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겨울방학이 되어 기차를 타고 삼랑진을 거처 강성갑이 시작한 학교가 있는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을 찾아 갔다.
거기에 한얼중학교라는 학교가 있기 때문이다.
그 건물이나 환경은 몹시 초라했지만 이 학교의 설립의 위대한 정신은 한반도 전체를 덮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신학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돌아와 교회를 섬기다가 8.15해방을 맞아 한때는 부산대학의 독일어 교수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강성갑에게 있어서 대학교수라는 직업은 아마도 따분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국가와 민족을 살리는 길이 농촌부흥에 있고 농촌의 부흥은 고등교육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중등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으므로 그는 대학을 그만두고 김해 진영에 중학교를 설립 하였던 것이다.
그는 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산을 다 팔아 별다른 영고도 없는 진영에서 중등 교육을 실시하여 그 운동이 전국에 퍼져 나가는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농촌에서의 자녀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천막을 지어 일을 시작했고 얼마 뒤에는 학생과 교직원이 힘을 합하여 흙벽돌을 만들었고 그들의 손으로 교실을 짓기 시작하였다.
비가 쏟아지고 세찬 바람이 몰아쳐 세 번이나 벽이 무너졌지만 용기백배하여 드디어 집을 짓고 교실을 만들었다.
혁신적으로 세워진 이 학교에는 교장과 교직원들의 월급액수가 같고 미장이, 목수에게도 같은 선생자격을 주어 똑 같은 대우를 받게햇다.
최에는 취사도 한 곳에서 하여서 밥과 국을 집집마다 받아다 먹는 철저한 평등사상으로 일관하여 뒤에 강성갑은 빨갱이로 몰려 그런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학생들을 데리고 농가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감나무를 심어 주었다.
농가의 주민들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무었을 바라면서 이런 일을 합니까? 라고 물었지만 강성갑은 농촌이 잘 사는 것을 바라는 진실하나 밖에는 없었다.
그는 점차 그 지역에서 힘을 얻어 그의 말 한마디가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고 그런 사실이 지역 유지들에게 미움을 산 것도 사실이었다.
겨울 방학 때 한얼 중학교를 찾아 갔던 학생들은 한 달 남짓 가르치고 서울에 돌아 왔는데 교장은 돈이 두둑하게 든 봉투를 우리들에게 건내 주면서 학비에 보태 쓰라고 하였다.
나는 하교를 마치면 한얼중학교에 가서 가르치리라 마음을 먹고 그의 서재에서 우찌무라 간조가 쓴(로마서 강해)라는 책을 한권 빌려가지고 돌아 왔는데 나는 그 책을 돌려주지 못하고 6.25를 맞은 것이었다.
뒤에 들은 애기지만 진영읍에 들어선 국군은 공산당에 관련되었다고 믿어지는 모든 주민을 구속하였고 그 중에서 목사 강성갑, 한얼중학교 이사장 최갑시가 끼어 있었다.
잘못 된 정보와 개인의 원한을 바탕으로 진영지서 김 모 서장과 그 지역의 심보가 고약한 유지 몇 사람에 의하여 요시찰 인물이 300명 가까이 체포되어 수용되어 있었고 한얼 붕학교 교장과 이사장은 불순분자로 분류되어 낙동강 수산교 모래사장에서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이사장 최갑시 다리에 총탄을 맞았지만 죽을힘을 다하여 낙동강에 뛰어들어 목숨을 건졌다.
그가 살아남지 못 하였다면 강성갑의 순교를 우리는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최갑시는 이렇게 증언 하였다.
강목는 순교에 앞서 기도할 시간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이 겨레를 가난과 재앙에서 건져주시고 한얼을 축복하여 주시고 이 죄인 주님의 뜻을 받들어 당신의 품에 육신과 영혼을 맡깁니다.
연희 전문 설립자 원두우 박사의 아들 원한경은 그 소식을 듣고 연희가 낳은 가장 훌륭한 졸업생이 비명에 갔다고 탄식했다는 것이고 그를 가르친 스승 최현배는 그 소식을 듣고 눈물을 감취 못하였다.
한시대의 애국자이며 동시에 순교자인 강성갑을 따륵고자 결심 했든 나는 훌륭한 지도자를 잃고 92세가 되기까지 하는 일 없이 살고 또 살아 강성갑의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