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면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1 (신반리新反里 서동 1구, 서동 2구)

2023-02-20     김진수 편집위원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는 허백영 문화원장님이 쓴 ≪우리고장 땅 이름≫과 박용식 교수가 쓴 ≪宜寧의 地名≫, 1930년대 발간된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의령향토문화연구소

 

▣부림면 신반리(新反里) 서동1구(西洞一區), 서동 2구(西洞二區)/서동네

삼국시대에 신반지역은 합천 대야성과 함께 신라와 백제가 서로 차지하려 다투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호국불교가 성행하였고 인근에 유학사, 대동사 등 유명한 사찰이 있다.

신반리 뒤쪽에는 오지산이 위치해 있다. 이 산은 손가락 모양의 다섯 개의 능선이 뻗어 신반리 뒤를 감싸고 있다. 풍수지리상 손가락처럼 나온 능선 사이의 골짜기가 명당터로 알려졌다. 이 산을 중심으로 다섯 성씨가 집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신반리는 현동, 대문동, 서동1구, 서동2구, 중동, 동동 여섯 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서동이 인구가 늘어나면서 서동 1구와 서동 2구로 분할하였다. 나뉘어져 있으나 한 동네처럼 이어져 있다. 봉수면으로 가는 도로에서 오지산 쪽이 서동1구이고 들판 쪽이 서동2구이다.

서동 1구 마을 뒤 오지산이 신반리를 보호하는 수호신과 같이 버티고 있다. 산쪽 마을 끝자락에 넓은 골짜기를 오랑골이라 한다. 한자로는 오랑(五郞) 또는 가곡(可谷)으로 표기하고 있다. 가곡이라는 이름은 가거처(可居處) 즉 ‘살기에 적합한 골짜기’의 줄인 말로 추정한다. 이 골짜기는 다섯 손가락 중 엄지와 검지 사이에 해당하며 주변 경치가 좋아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다. 남쪽으로 트여 있어 볕이 잘 들고 포근하다. 트인 계곡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가곡정사가 있다.

 

사진=은행잎

○가곡정사(可谷精舍)

상촌(桑村) 권병현(權秉鉉)공의 학덕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가곡에 세운 재실이다. 공은 명성과 영리에는 뜻이 담담하고 꿈에서도 벼슬길을 멀리하여 효도와 공경을 몸소 행하고 마음은 갓난아이 시절을 잃어버림이 없는 분이었다고 한다. 후손들이 중수를 해서 관리를 잘 해왔으나 지금은 마당에 잡풀이 무성하다. 정사 앞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어 고색창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는 고풍스러운 재실과 잘 어울린다.


○화은정사(華隱精舍)

가곡정사에서 내려오면 화은정사(華隱精舍)가 있다. 역시 안동 권씨 재실이다. 문중에서 재실을 짓는 것은 성리학의 체계를 세운 주희가 무이산에 은거하면서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세운 전통을 따른 것이다. 이러한 전통을 따라 화은(華隱)공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립했다. 기문은 집안 동생이 되는 권용현(權龍鉉)이 지었다.

○화수재(花樹齋)

사진=화수재

안동 권씨 문중 재실이다. 안동권씨가 신반에 살게 된 것은 상암선생(霜嵒先生) 과 덕암공(德庵公) 부자로 부터이다. 덕암공의 맏아들인 증사복정공(贈司僕正公) 후손이 서동에 살게 되었다. 그 후손이 일가가 친족을 모으고 손님을 맞이하고 자제들이 학업을 익히도록 화수재(花樹齋)를 세웠다. 재실에는 글 읽는 소리와 방문하는 손님의 수레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고 한다.

○명석정(明石亭)

각재(覺齋) 권삼현(權參鉉)선생이 골짜기 시냇가에 정자를 세우고 학문을 강론하고 닦았던 곳이다. 봉수면과 부림면 경계지역인 명석골 안 깊숙한 곳에 1915년에 지은 정자다. 그러나 명석골에 부림면 수원지를 건설하면서 재실이 철거되었다. 그래서 명석정을 신반리 서동에 신축했다.

권삼현 선생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경효(景孝), 호는 각재(覺齋)이다. 아버지는 권재봉(權載鳳)이며, 어머니는 상주 주씨(尙州周氏)로 주진열(周軫烈)의 딸이다. 송병선(宋秉璿)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또 송병순(宋秉珣)·최익현(崔益鉉)·전우(田愚) 등과 교유하였다.

1905년 일본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스승 송병선이 자결함을 본 공은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은거하면서 동문들과 함께 스승의 문집을 편집·간행하였다. 1909년 송병순이 만동묘(萬東廟) 복원을 주장하자 함께 복원사업에 앞장섰다. 그러나 1912년 송병순 마저 순국하자 초계(草溪) 붕산(鵬山)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붕산에 모여들자, 1916년 가솔(家率)을 거느리고 황해도 깊은 산중에 숨어 나물을 뜯고 낚시질을 하며 소일하다가 1918년 부친상을 당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칩거하였다. 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공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신학문이 들어옴으로 갈등이 생기고 문하를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상암공(霜嵒公) 권준(權濬) 세거비(世居碑)

사진=상암공

약 400년 전에 상암공이 신반으로 들어와 살았다. 공의 학덕을 물려주기 위하여 만덕산 재석봉아래 동화재(東華齋)를 세웠는데 세월이 흘러 재실이 퇴락하여 보수하였으나 결국 황폐해졌다. 후손들이 재실을 복원하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이에 선조의 사적을 후손에게 알리기 위하여 길가에 상암공 권준선생의 사적비와 세거비가 나란히 세웠다. 권준선생은 현 대문동 일대에 흐르던 하천의 물길을 돌리고 하천부지를 정비하여 현재 신반리 대문동의 형태를 갖추었다. 상암선생의 묘소는 의령읍 상리 상신 마을 벽화재 재실 뒤편 벽화산 기슭 명당자리에 있다.

▣서동2구(西洞二區)/서동네

‘서동2구(西洞二區)’는 부림면 신반리(新反里)의 행정마을이다. 길 건너 넓은 들을 끼고 있는 지역이 서동2구 마을이다. 토박이들은 서쪽에 있는 동네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서동네’라고 부른다. 마을 가운데 어모장군선산김공승서지배숙부인순창설씨창열비(禦侮將軍善山金公承緖之配淑夫人淳昌薛氏彰烈碑)가 있는 꽃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찾을 수 없다.

○숙부인순창설씨창열비(淑夫人淳昌薛氏彰烈碑)

이 비석과 관련된 기록이 ≪의춘지≫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설씨는 옥천군 계조의 증손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들이닥치자 남편 김승서가 설씨 부인과 처녀가 된 딸아이를 데리고 피난을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왜병이 생각보다 빨리 들이치자 설씨 부인은 세 식구가 함께 가면 더욱 위태로우니 남편을 먼저 피신시켰다. 남편을 피신시키느라 지체하는 사이에 왜군이 닥쳤다. 남은 가족은 피할 길이 없어 부인은 칼을 들어서 먼저 딸아이를 죽이고 자신도 자결해 죽였다. 왜병들이 설씨 부인의 용기에 감복하여 돌을 세워 표시를 하고 물러갔다.” 부인의 지혜로 남편을 살렸고 용기로 정절을 지켰으므로 나라에서 정문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