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22 (상리 산다, 안산다 마을)

2022-12-23     김진수 편집위원

‘의령의 땅 이름 유래와 역사이야기’는 허백영 문화원장님이 쓴 ≪우리고장 땅 이름≫과 박용식 교수가 쓴 ≪宜寧의 地名≫, 1930년대 발간된 ≪의춘지≫, ≪의령군지≫를 참고했다.

▣상리(上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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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리(上里)’는 의령읍의 법정(法定) 동리(洞里)이며 산다(山多), 상신(上新)’ 등의 행정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옛날에는 상촌(上村)으로 부르기도 했다. 1910년의 지명을 반영하고 있는 <조선지지자료>에는 덕곡면(德谷面) 상동(上洞)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현재의 상리는 ‘상촌(上村) > 상동(上洞) > 상리(上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음을 알 수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신촌동(新村洞), 산다동(山多同), 가항동(加項洞) 일부를 병합하여 풍덕면(豊德面)에 편입하여 풍덕면 상리가 되었다. 그 뒤 1922년 풍덕면(豊德面)이 의령면(宜寧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이후로 의령면(宜寧面) 상리(上里)가 된 것이다.

의령의 종합지리지인 ≪의춘지≫에 보면 상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상리(上里)는 고려 왕족의 후손이 대대로 산다. 또 강씨와 청송 심씨, 덕수 장씨 등 세 성씨가 살고 있다.(上里 麗王遺裔所居 又姜 沈 靑松 張 德水 三氏寓之).”

 

□산다(山多)/산대골/ 안산다

‘산다(山多)’는 의령읍 상리(上里)의 행정마을이며 의령읍 덕실골(德谷)의 가장 안쪽에 있는 산골 마을이다. 토박이들은 ‘산대골’이라 부른다. ‘산대’가 ‘산에 있는 대나무인 산죽(山竹)’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유추하면 ‘산대골’은 산죽이 많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을 지형을 살펴보면 그냥 산이 많은 마을이란 의미로 뫼산(山) 많을다(多)에서 ‘산다’라 불렀을 가능성이 많다. 마을은 안산다(안쪽 산다)와 외산다(배껕 산다) 두 뜸이 있고 건너 골짜기에 몇 집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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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남씨 문중 산소

산다 마을 뒤쪽 안산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경사진 산등에는 의령 남씨 문중 조상 대대로 조성한 산소가 있다. 이곳은 옛날부터 유명한 명당자리라고 한다. 산 아래에서 위로 층층이 산소가 늘어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특히 전통적인 문중 산소 조성 방식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모송재(慕松齋)

고려가 망하고 이씨 조선이 개국하면서 개성 왕씨 일가가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옛 도읍 송도(개성)를 그리며 재실 이름을 모송재(慕松齋)라 지었다. 모송재는 고려 태조 열다섯째 아들 동양군 원(垣)의 후손인 서(瑞)의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재실이다. 문봉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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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鳳鎬)가 쓴 기문에 보면 “조상을 추모하는 도가 오로지 집을 크게 짓고 제수를 좋게 장만하고 부지런히 산소를 배알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시와 예의를 배워서 선대의 유업을 떨어뜨리지 않으며, 빈천에 슬퍼하지 않고 그 발굼치를 굳게 가두고 의를 지키어 세상 변함에 따르지 않아야 한다.”라고 조상을 섬기는 도리를 밝히고 있다. 이 가름침은 모든 문중 후손들이 지켜야할 규범이라 할 수 있다. 모송재 대문 밖에는 자헌대부 행강릉부사 왕장(王璋)공과 병사를 지낸 왕종지(王宗智)공의 추모비가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허덕재구지(許德齋舊址)

아랫산다 동구 밖에는 허덕재구지(許德齋舊址)란 돌비석이 있다. 원래 김해 허씨 종중 재실이 있었던 자리에 이 비를 세웠던 것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찾을 수 없어 아쉽다.

 

○산다 마을 공룡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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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에는 공룡발자국 화석이 많이 발견된다. 의령교회 앞에는 화석 빗자국과 공룡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 산다 마을 하천변에도 2008년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활동하던 초식공룡으로 추정되는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 현장 확인결과 길이 36㎝, 폭 34㎝, 깊이 1~5㎝의 공룡발자국 2개로 세 발가락이 찍히고 발뒤꿈치는 야구 글러브처럼 뭉툭한 형태로 전형적인 조각류 공룡으로 파악됐다. 조각류(鳥脚類) 공룡은 발가락은 3갈래로 나눠져 삼지창 모양을 하고 있다. 뒤꿈치는 넓고 둥글며, 발가락 사이가 넓게 벌어져 있다. 육식 공룡 발자국과 비슷하지만 육식 공룡과는 달리 발가락 끝에 날카로운 발톱 자국이 없고 대부분 발자국이 나란히 찍힌 채 발견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 한계레 신문>

 

○가매실재

안산다(내산다)마을 앞 골짜기에 ‘내산다 소류지’가 있다. 이 소류지에는 물이 부족하면 남강에서 파이프를 통하여 물을 끌어 올 수 있는 특별한 장치가 있다. 즉 남강물을 끌어다 소류지에 저장했다 방류하는 방식이다. 이 소류지를 지나 나오는 고개가 ‘가매실재’다. 화정면 부곡(가매실)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가매’가 지역어로 솥을 의미하고 재 넘어 있는 마을 이름이 ‘가매실’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부곡사람들이 의령장 보러 가거나 학생들 등·하교 때에 자주 이용하여 큰 길이 나 있던 고개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여러 산고개

안산다 마을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고개와 골짜기가 많다. 그래서 안산다 마을은 옛날에는 여러 고개 통로의 요충지였다. 그래서 여러 마을로 통하는 고개가 많다. 대산리 오감마을로 통하는 오감재가 있다. 그리고 만상, 만하 마을로 통하는 마내재가 있고 대산 마을로 통하는 대산재가 있다. 대산 마을 아이들은 대산재를 넘어 벽화초등학교에 다녔다. 초등학생들이 더우나 추우나 20리 산길을 걸어서 통학했던 것이다.

안산다 마을 뒤쪽 골짜기로 올라가면 미안골(미인골)이 나온다. 미안골은 지나면 작은 소류지가 나온다. 이 소류지 위쪽이 비신골이다. 산쪽으로 올라가면 상사바위가 나온다. 마을 아이들이 소 풀먹이고 놀기도 하던 장소이다. 옛날 마을 사냥꾼들이 표범이나 호랑이를 잡기도 했다고 한다.

상사바위에서 내려오면 토박이들이 ‘구시미’라 부르는 곳이 있다. 안산다에서 더 깊은 산속인데 개성 왕씨들이 은거해서 살던 곳이라 한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산다, 안산다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포근하고 안온하면서 옛 전통이 이어져 오는 마을이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나가고 주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래도 도시에서 하나씩 둘씩 귀촌하고 있어 희망의 끈이 있다. 산골의 아름답고 조용한 전원마을로 꾸미면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 것 같다.